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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IMF로 알고 있는 국제통화기금은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과 동시에 세계은행과 함께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97년 IMF 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제통화기금은 달러가 부족한 국가에 달러를 빌려주는 국제기구다. 기금은 선진국들이 일정 금액을 기금형태로 출자하여 조성한 것이다. 국가별로 같은 금액을 출자한 것이 아니라 국가별로 특별인출권에 맞게 배당 형식으로 출자한다. 국제통화기금에 주로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국가는 유동성의 위기로 달러가 부족하거나 방만한 재정 정책으로 외화 관리가 불안정한 국가이다. 재정 지원을 받은 국가는 신용도가 깎이고 국제통화기금의 지시에 따라 해당 국가의 경제 구조를 재편해야 하는 제약도 있다. 이러한 제약의 명분은 경제 개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의 기업이 외국에 아주 싼 가격에 팔려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구제 금융을 받은 국가는 국제통화기금이 좋은 인식이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국제통화기금의 정책에 따르는 정부에 대한 불만도 심한 경우가 많다. 심하면 국제통화기금은 사회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사안 의결 시 배당의 85퍼센트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17% 정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제통화기금 안건에 대한 거부권이 있다. 만약 국제통화기금에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런 안건도 처리할 수 없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8년 국제통화기금에서 구제금융안을 파키스탄에 대해 제의했었다. 하지 미국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미국은 중국을 직접 겨냥하며 거부권 의사를 밝혔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18세기부터 국제적인 금융 체제의 중심인 영국 파운드 스털링의 금본위제가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마감되었다. 그러한 시기에 맞물려 국제통화기금과 국제무역체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4년 7월 미국의 뉴햄프셔주의 브레튼우즈에서 국제연합 금융재정 회의를 거쳐 브레튼 우드 체제를 출범하였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이 브레튼우즈를 통해 창설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제무역기구는 창설되지 못했다. 그 후로 50년간 무역과 관세에 대해서는 일반 협정 체제로 유지했다. 1995년 우루과이 라운드 시행으로 세계 국제무역기구가 출범하게 된다. 국제통화기금는 최초에는 29개국이 참가했다. 1947년 3월 국제통화기금협정이 발효된 후로 업무를 개시했다. 국제통화기금은 국제 연합과 협정을 맺은 후 전문 기관으로 인정받았다. 국제통화기금 최초 설립 시기에는 미국의 달러와 연동된 금태환제가 기초였다. 그래서 국제통화기금은 고정환율제로 운영되었다. 상세히 설명하면 한 국가가 유동성 문제로 급히 달러가 필요한 경우 달러를 빌리기 위해서는 국가가 보유한 금을 국제통화기금에 제출하고 달러를 받는 형태였다. 쉽게 말하면 통화 스와프와 유사한 형태였다. 국제통화기금의 변동 환율은 1퍼센트의 여유가 있다. 그 이상의 변동환율이 허용되는 경우는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이다. 미국은 달러를 빌려주는 대신 어느 정도의 통화 수지 적자를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은 국제 경제를 재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국가들이 1960년대에 경제 부흥을 일으켜 경제 강국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국제 수지의 적자가 늘어났다. 그 시기에 브레튼 우드 체제도 점차 붕괴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달러가 필요하지만 미국도 하나의 국가이기 때문에 통화 수지 정책 시행을 위해서 무작정으로 달러를 발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달러화의 유동성이 점점 떨어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반대로 달러화의 국제적 수요를 충족시키니 위해 달러를 찍어내면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트리핀 딜레마라고 한다. 미국과 국제통화기금은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을 막고자 노력했다. 1971년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서 스미소니언 협정을 했다. 금 태환 가격을 조정하고 미국 달러가 평가절하된 것에 상응하는 일본과 독일 화폐의 평가절상에 서로 합의했다. 과거의 변동 환율 폭도 1퍼센트에서 2퍼센트 이상으로 확대했다. 이후 국제 금융 질서는 1944년 브레튼 우주 체제가 설정했던 방향과 킹스턴 체제 당시의 협정 내용에 의해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다. 21세기에는 신흥국의 부상으로 유럽과 미국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 경주 G20 회의에서는 기존 유럽 국가들의 특별인출권과 쿼터를 줄였다. 대신 과소평가 받던 신흥국의 쿼터와 특별인출권을 늘렸다. 그동안 국제통화기금에는 유럽과 미국 출신의 사무총장이었던 관례를 깬 사례가 있다. 2012년 중국의 경제학자 린젠하이가 국제통화기금의 새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이 임명되었다. 한국에서는 외환위기 당시의 사회적 혼란 때문에 국제통화기금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 뿐 아니라 동유럽과 중남미 국가에서도 국제통화기금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은 구조조정 정책과 고금리 정책을 대한민국에 요구했다. 그 후로 많은 사람이 정리해고되고 비정규직법이 등장하여 외환위기 이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전과 비교하여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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