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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 대하여

소상공인 재기지원금 300만원 2020. 7. 12. 21:08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출판하면서 경제학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국부론은 1776년에 발표되었으며 애덤 스미스 이전에도 경제학에 대한 이론이 있었으나 체계성과 학문성으로 인정을 받게된 계기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발표 전과 후로 나뉜다. 애덤 스미스는 1723년 6월 5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애덤 스미스는 정치 경제학자이며 윤리철학자다. 후대의 수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은 애덤 스미스의 저작이다. 애덤 스미스는 고전 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명이며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 스스로를 철학자로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았던 시기는 20세기의 일이다. 그의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 날짜를 출생일로 사용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네 살 무렵 집시 일행에게 납치되었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애덤 스미스는 열 네 살에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한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인 프랜시스 허치슨에게 윤리 철학을 배웠다. 옥스퍼드 대학에는 1740년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 대학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1746년에 옥스퍼드를 자퇴한다. 1748년에 에든버러에서 공개 강의를 한 것을 계기로 1751년에 글래스고 논리학 강좌 교수로 선임된다. 1752년에는 도덕 철학 교수가 된다. 데이비드 흄은 1750년에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발표 전 1759년 도덕감정론을 세상에 공개한다. 그는 도덕감정론 발표와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1764년 교수지글 사임하고 한 귀족의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타운젠트 공작의 장남의 개인 교사가 되어 2년동안 유럽을 여행하게 된다.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많은 사상과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론을 흡수하고 정리했다. 세계여행 후 저작활동에 집중하면서 발표한 책이 1776년에 공개된 국부론이다. 국부론은 정부가 민간의 경제 생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는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중요시 여겨지지 않았다. 국가는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 경제에서 개인이 스스로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두면 저절로 가격이 형성되며 시장이 흘러갈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를 높이고 국가 경제 발전이 촉진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정부의 필수적 의무 세 가지를 주장한다. 첫 째는 국가는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이는 다른 나라의 폭력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둘 째는 국가는 사법제도를 엄정히 세워야 한다. 국가는 모든 구성원이 불의나 억압에서 자유롭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공공사업과 공공 기구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제적인 경제 질서 속에서도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했다. 정부가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를 부과하고 수입을 제한하는 것은 지나친 개입이며 시장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애덤 스미스는 당시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중상주의의 주장은 국민의 부가 금은 화폐 보유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작업능률과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그 작업 능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분업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슨의 국부론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이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가장 깊은 통찰력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하는 장소와 시대에 살았다. 아담 스미스는 모든 거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때, 정의상 상호 이익이 된다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는 의외로 낯가림이 다소 심했다. 키가 작고 말을 더듬었다. 그는 얼굴을 계속 흔드는 버릇이 있었고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독신이었다. 여성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반대했다. 그리고 자유시장과 자유 무역의 옹호자였다. 애덤 스미스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자유 방임주의를 교조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선의와 역량에 믿음이 없었고 정부를 통제하는 사람들과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꿰뚫고 있었다. 스미스는 더 나은 수단이 없다면 개인이 하지 않을 것 같거나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잘못 될 가능 성이 있는 여러 일을 정부에 맡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 중 한 사례로 소개하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비판을 적었다. 박애를 지나치게 중시한 결과 나머지 지역과 민족의 복합적 특성을 간과하고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로마 제국의 혼란과 멸망을 초래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 나오는 공정한 관찰자개념은 프로이트가 소개한 초자아의 개념과 비슷하다. 애덤 스미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발표하지 않은 많은 글을 친구에게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20권 분량에 달하는 책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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